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문단 편집) === 전초전 : 롤란드 작전과 미우스 공세 === 쿠르스크 전투가 한창이던 7월 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육군참모총장 쿠르트 차이츨러 보병대장과 육군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아돌프 호이징거]] 중장은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12일부터 쿠투조프 작전을 시작하면서 브랸스크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오룔 북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하자 중부 집단군은 공세를 지속할 힘을 잃었다. 육군최고사령부의 많은 참모장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일, 히틀러는 공세를 중단하고 2SS기갑군단을 후방으로 빼내 이탈리아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귄터 폰 클루게|클루게]]는 공세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기에 찬성했으나[* 그러나 2주 뒤, 무솔리니가 체포되면서 히틀러가 이탈리아 방면의 전략 예비를 확보하기 위해 돌출부 전면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자 이에는 반대했다. 2기갑군과 9군은 오랜 기간동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기에 이 방어선을 지연전도 없이 그냥 내주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슈타인은 강력히 반대했다.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이 소련군의 1,2차 방어선을 돌파한 상태이고 이제 소련군 후방으로 진격하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스텝 전선군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이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심지어 소련군은 예상보단 많은 예비대를 투입해야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다지 많은 예비 전력을 투입한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부집단군은 24기갑군단을 예비로 보유중이었으며 적이 공격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하리코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세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이 공세를 중단한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남부집단군만으로 작은 포위망을 만들어 적의 공세 가능성을 제거할 롤란드 작전(Operation Roland)을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14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17일에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이 미우스 강에서 공세를 각각 시작하자 이마저도 불가능해져버렸다. 만슈타인은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을 7월 5일의 작선 개시선으로 후퇴시켰고 24기갑군단[* 17, 23, 비킹]과 2SS기갑군단[* 군단본부와 LSSAH는 이탈리아로 이동했고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만 남쪽으로 이동]을 남쪽으로 즉시 증원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세가 중단되자 23일부터 루미안체프 작전을 시작할 것을 원했으나 주코프의 만류로 8월 3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미우스 방면의 공세는 완벽한 실패였지만[* 그냥 예비를 부르기 위한 조공이라기엔 너무 큰 규모였으며 스타브카의 기록을 볼 때 큰 기대는 안했지만 그래도 그 이상의 성공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남아있는 독일군 예비를 모두 불러오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